바운티 호의 반란(1962년 영화)은 1787년 윌리엄 블라이 선장의 지휘 아래 빵나무 묘목을 자메이카로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HMS 바운티 호에서 발생한 반란을 다룬 영화이다. 말론 브란도가 부선장 플레처 크리스찬 역을, 트레버 하워드가 블라이 선장 역을 맡았다. 영화는 제작 과정에서 감독 교체, 말론 브란도의 과도한 행동 등으로 인해 제작비가 초과되었고 흥행에 실패했지만, 바운티 호의 반란 사건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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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운티 호는 윌리엄 블라이 선장의 지휘 아래 영국을 떠나 타히티로 항해하여 빵나무 묘목을 싣고 자메이카로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항해는 시작부터 치즈 분실 사건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블라이는 선원 존 밀스를 범인으로 지목하여 가혹하게 채찍질했다. 이에 부선장 플레처 크리스찬은 혐오감을 느꼈다. 블라이는 케이프 혼을 돌아가는 짧은 항로를 택했지만 실패했고, 빵나무의 휴면기로 인해 몇 달을 더 지연해야 했다.
자메이카로 가는 항해에서 블라이는 빵나무를 두 배로 가져가기 위해 선원들의 물 배급량을 줄였다. 이 과정에서 선원 한 명이 블라이를 공격하여 키르하울링을 당하고, 다른 선원은 바닷물을 마시고 병에 걸리는 등 상황은 악화되었다. 크리스찬은 선장의 명령을 어기고 깨끗한 물을 주려다 블라이에게 폭행당하고, 결국 배의 지휘권을 잡게 된다.
크리스찬은 블라이와 그에게 충성하는 선원들을 롱보트에 태워 토푸아 섬으로 보냈지만, 블라이는 식인 풍습을 피해 네덜란드 식민지인 쿠팡의 티모르 섬으로 향했다. 이후 영국으로 돌아간 블라이는 군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한편, 크리스찬은 타히티로 돌아가 마이미티와 승무원들의 여자친구들을 데리고 핏케언 섬에 도착한다. 그는 블라이의 잘못을 증언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밀스와 나머지 일행은 이를 막기 위해 《바운티》호에 불을 질렀고, 결국 크리스찬은 배가 불타 침몰하는 동안 사망한다.[1]
2. 1. 영국에서 타히티로
1787년, 윌리엄 블라이 선장의 지휘 아래 바운티 호는 영국을 떠나 타히티로 항해했다. 그의 임무는 빵나무 묘목을 싣고 자메이카로 수송하는 것이었다. 영국 정부는 이 빵나무 묘목들이 자메이카에서 번성하여 노예들에게 저렴한 식량 공급원이 되기를 희망했다.[1]
항해는 치즈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면서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선원 존 밀스는 치즈를 훔친 절도범으로 블라이를 비난했고, 블라이는 상관에게 불경죄를 범했다는 이유로 밀스를 잔혹하게 채찍질하여 부선장인 플레처 크리스찬의 혐오감을 샀다. 블라이는 케이프 혼을 돌아가는 더 짧은 서쪽 항로를 시도하여 타히티에 더 빨리 도착하려 했다. 그러나 이 전략은 실패했고, 바운티 호는 동쪽으로 되돌아가 항해에 귀중한 시간을 잃게 되었다. 블라이는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승무원들을 더욱 몰아붙이고 식량을 줄였다.[1]
바운티 호가 타히티에 도착하자, 승무원들은 열대 낙원의 유유자적한 삶과 타히티 여인들의 자유로운 성 관념에 흠뻑 빠졌다. 크리스찬 자신도 타히티 왕의 딸 마이미티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한편, 블라이는 빵나무의 휴면 기간으로 인해 빵나무 묘목을 심을 때까지 몇 달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에 더욱 격분했다. 출발일이 다가오자, 밀스를 포함한 세 명의 선원이 탈주를 시도했지만 크리스찬에게 붙잡혀 블라이에게 쇠사슬에 묶였다.[1]
2. 2. 타히티에서의 생활
바운티 호가 목적지인 타히티에 도착하자, 승무원들은 열대 낙원의 유유자적한 삶과 타히티 여인들의 자유로운 사랑 철학에 흠뻑 빠진다. 플레처 크리스천 자신도 타히티 왕의 딸 마이미티에게 마음을 빼앗긴다.[1] 이러한 안락함과, 다시 윌리엄 블라이의 지배 아래에서 시작될 가혹한 규율의 긴 여정에 대한 예측은 수병들을 반란으로 이끌었다.[2]
2. 3. 반란과 그 이후
항해 중 치즈 분실 사건이 발생하고, 윌리엄 블라이 선장은 존 밀스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블라이는 상관에게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밀스를 채찍질하고, 이를 본 부선장 플레처 크리스찬은 혐오감을 느낀다. 블라이는 케이프 혼을 돌아가는 짧은 항로를 택하지만 실패하고, 빵나무의 휴면기로 인해 몇 달을 더 지연해야 했다. 자메이카로 가는 항해에서 블라이는 빵나무를 두 배로 가져가기 위해 선원들의 물 배급량을 줄인다. 선원 한 명이 블라이를 공격하여 키르하울링을 당하고, 다른 선원은 바닷물을 마시고 병에 걸린다. 크리스찬은 선장의 명령을 어기고 깨끗한 물을 주려다 블라이에게 폭행당하고, 결국 배의 지휘권을 잡는다.[1]
크리스찬은 나침반과 빈약한 식량을 가진 블라이와 그에게 충성하는 선원들을 롱보트에 태워 토푸아 섬으로 보낸다. 블라이는 식인 풍습을 피해 네덜란드 식민지인 쿠팡의 티모르 섬으로 향한다.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 군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지만, 《바운티》호의 선장으로 임명된 것은 실수였다는 결론이 내려진다.[1]
크리스찬은 타히티로 돌아가 마이미티와 승무원들의 여자친구들을 데리고 핏케언 섬에 도착한다. 크리스찬은 블라이의 잘못을 증언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밀스와 나머지 일행은 이를 막기 위해 《바운티》호에 불을 지른다. 크리스찬은 배의 육분의를 가져오려다 치명적인 화상을 입고, 《바운티》호가 불타 침몰하는 동안 마이미티의 품에서 죽는다.[1]
1962년 영화 《바운티 호의 반란》은 찰스 노드호프와 제임스 노먼 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조지 W. 데이비스, 헨리 그레이스, 휴 헌트, J. 맥밀런 존슨이 미술을 담당했으며, 모스 마브리가 의상을 맡았다.
Technicolor영어와 와이드스크린 형식(MGM 카메라 65)으로 촬영하기 위해 로버트 서티스를 촬영 감독으로 하여 타히티에서 현지 촬영을 진행했다.[6] 이 영화는 1960년 10월 15일에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었으며, "MGM의 1961년 ''벤허''"라는 별칭을 얻었다.[6]
4. 1. 기획 및 각본
1935년 영화 《바운티 호의 반란》의 성공 이후, 감독 프랭크 로이드는 1940년에 스펜서 트레이시 또는 찰스 로튼을 주연으로 하여 윌리엄 블라이 선장의 후반 생애를 다룬 속편 제작 계획을 발표했지만, 영화는 제작되지 않았다.[4] 1945년 케이시 윌슨은 클라크 게이블을 플레처 크리스찬 역으로, 크리스찬의 핏케언 섬에서의 삶을 다루는 ''바운티 호의 크리스찬''이라는 시나리오를 썼지만[4] 이 또한 영화화되지 않았다.
1950년대에 MGM은 《스카라무슈》와 《젠다의 포로》를 포함하여 초기 성공작들을 컬러 및 와이드스크린 형식으로 리메이크했다. 그들은 《바운티 호의 반란》을 리메이크하기로 결정했고, 1958년 스튜디오는 아론 로젠버그가 이 영화를 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말론 브란도가 주연 배우로 언급되었다.[5]
에릭 앰블러는 주당 5000USD를 받고 시나리오를 쓰기로 계약했다. 이 시나리오는 노드호프와 홀의 소설 《바운티 호의 반란》과 《핏케언 섬》의 내용을 결합할 예정이었다. MGM은 반란 이후 블라이의 보트 항해를 다룬 세 번째 책인 《바다를 향한 남자들》의 판권도 소유하고 있었다.[4] 1959년, 파라마운트는 제임스 클래벨이 쓰고 연출하는 경쟁작 《반역자들》을 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영화는 핏케언 섬의 반역자들의 운명을 다룰 예정이었다.[4]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진행되지 않았다.
말론 브란도는 결국 MGM과 계약을 맺었고, 출연료는 50만달러에 수익의 10%였다. 캐럴 리드가 연출을 맡게 되었다.
MGM 임원들은 앰블러의 각본에 불만을 품었지만, 작가는 14번의 초고를 썼다고 추정했다.[10]존 게이는 1960년 7월에 버전을 쓰도록 계약되었다. 결국, 윌리엄 드리스코, 보든 체이스 (1960년 8월 집필), 하워드 클루스, 그리고 찰스 레더러가 모두 각본을 썼다.[24] 한 보고서에 따르면, 앰블러는 여정의 첫 번째 3분의 1을, 드리콜은 타히티에서의 삶에 대한 두 번째 부분을, 체이스는 반란과 그 이후에 대한 세 번째 부분을 담당했다. 게이는 내레이션을 썼다. 레더러는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 참여했다.[11]
4. 2. 캐스팅
말론 브란도가 플레처 크리스천 역으로, 트레버 하워드가 윌리엄 블라이 역으로 캐스팅되었다.[13] 1960년 7월, 피터 핀치가 블라이 역을 맡기로 계약했으나,[12] 8월에 하워드에게 역할이 돌아갔다.[13] 브란도는 자신의 연인 역을 맡을 타히티 현지 출신 타리타 테리파이아를 직접 선택했다.[15]
4. 3. 촬영
Technicolor영어와 와이드스크린 형식(MGM 카메라 65)으로 촬영하기 위해 로버트 서티스를 촬영 감독으로 하여 타히티에서 현지 촬영을 진행했다.[6] 150명 이상의 배우와 제작진이 타히티에 도착했고, MGM은 200개 이상의 호텔 객실을 사용했다.[15][16] 바운티호의 복제품은 노바스코샤에서 75만 달러(750000USD)를 들여 제작되었으나, 예정된 6개월이 아닌 9개월이 걸려 촬영 시작 후에야 도착했다.[14]
1960년 11월 28일에 촬영이 시작되었지만,[17] 각본 수정과 말론 브란도의 즉흥 연기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17] 외딴 위치 때문에 비용도 많이 들었다.[17] 브란도는 이후 섬과 원주민과의 상호 작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1961년 1월, 3개월 후 캐럴 리드 감독은 "밝혀지지 않은 질병"으로 촬영지에서 돌아왔다.[19]담석과 열사병 발작이 원인이었지만, 일각에서는 이야기 방향에 대한 이견으로 불만을 품었다고도 한다.[14] 우기가 시작되면서 촬영이 중단되고 제작진은 할리우드로 돌아갔다.
MGM은 리드에게 100일 안에 영화를 완성할 것을 요구했지만, 리드는 139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여 해고되었다.[21]루이스 마일스톤이 감독으로 교체되었다.
1961년 3월, MGM 스튜디오에서 촬영이 재개되었다. 마일스톤은 처음 2주 동안은 브란도가 얌전히 행동하여 많은 일을 해냈다고 회고했다.[22]
1961년 4월, 촬영팀은 타히티로 돌아갔으나, 악천후와 시나리오 문제, 리처드 해리스와 브란도의 충돌, 브란도의 잦은 지각과 촬영 중 비협조적인 태도로 어려움을 겪었다.[14][23] 마일스톤은 찰스 레더러가 현장에서 시나리오를 끊임없이 수정했으며, 로젠버그, 솔 시겔, 조지프 보겔, 브란도까지 참여했다고 말했다.
결국 영화는 예상보다 1,000만 달러(1000만달러) 더 많은 비용이 들었다.[24] 카누 장면 촬영 중 타히티인이 사망하는 사고도 발생했다. 촬영은 1961년 10월에 완료되었다.
말론 브란도의 과격한 행동은 촬영 중부터 전설이 되었다.
브란도는 친구의 타히티 결혼식 장식을 위해 촬영 스태프를 보내거나, 자신의 파티를 위해 비행기로 값비싼 음식과 음료를 공수해 오게 했다.
브란도는 과식으로 인해 의상실에서 52벌의 바지를 찢어 버렸다.
브란도는 훗날 마이미티 역을 연기한 타리타 테리피아와 실제로 결혼했다.
영화를 위해 바운티 호의 움직이는 레플리카가 제작되었지만,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불태워지도록 되어 있었다. 브란도는 예비 레플리카가 제작되지 않으면 영화 촬영을 계속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감독과 프로듀서는 결국 브란도의 요구에 굴복하여 불태울 레플리카를 제작하고, 원래의 레플리카는 남겨두었다. 이 레플리카는 2007년 여름에 영국의 여러 항구를 방문했다[51]。이후, 2012년 발생한 허리케인 샌디의 영향으로 침몰했다[52]。
4. 4. 후반 작업
촬영이 끝난 후에도 각본은 계속 수정되었으며, 추가 촬영이 진행되었다.[8] 제작진은 반란 이후 선원들의 운명에 더 초점을 맞추고, 블라이 선장은 단역으로, 반란은 회상 장면으로 다루기로 했다. 이는 말론 브란도의 아이디어였다.[8]
최종 편집 과정에서 결말 부분이 변경되기도 했다. 원래는 희망적인 분위기로, 선원들이 고통과 잔혹함이 없는 새로운 삶을 꿈꾸는 내용이었다.[8] 그러나 영화는 크리스찬이 핏케언 섬에서 죽는 비극적인 결말로 마무리되었다.
5. 평가
이 영화는 비평가들로부터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웅장한 영상미와 배우들의 연기는 호평을 받았지만, 각본의 완성도와 말론 브란도의 연기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다.[28][29][30][31][32][33] 특히, 말론 브란도가 연기한 플레처 크리스찬은 "강력한 해군 장교보다는 멋쟁이처럼" 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28] 반면, 트레버 하워드가 연기한 윌리엄 블라이 선장은 오히려 동정심을 유발한다는 평가도 있었다.[30]
제작비는 당초 예상보다 두 배 이상 증가한 20000000USD가 소요되었으며, 손익분기점을 넘기 위해서는 40000000USD를 벌어야 했다.[36][17] 1962년 미국 내 흥행 5위를 기록하며 13680000USD를 벌어들였고,[2] 연말까지 미국 내 극장 임대료는 7400000USD였다.[37] ''버라이어티''는 임대료가 9800000USD까지 오를 것으로 예상했지만,[38] 결국 제작비를 회수하지 못하고 흥행 참패했다.[39] 이로 인해 스튜디오는 그 해 17000000USD의 손실을 보았다.[40]
이 영화는 이 시기 MGM에서 제작된 ''왕 중의 왕'', ''서부 개척사'', ''그림 형제'', ''묵시록의 4기사''와 같은 대작 중 하나이다.[41]
5. 1. 비평
영화는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웅장한 영상미와 배우들의 연기는 호평을 받았으나, 각본의 완성도와 말론 브란도의 연기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28][29][30][31][32][33]
보즐리 크로더는 ''뉴욕 타임스''에 "순수한 구경거리로서 눈을 즐겁게 하고 압도하는 부분이 많다"라고 썼지만, 말론 브란도가 플레처 크리스찬을 "강력한 해군 장교보다는 멋쟁이처럼 만들었다"고 비판하며 "이 연기는 조롱이나 장난으로 의도된 것처럼 느껴진다"라고 평했다.[28]
''버라이어티''는 이 영화를 "종종 압도적으로 웅장하다"고 칭하며 1935년 버전에 비해 "전반적으로 뛰어나다"고 평하며 "브란도는 여러 면에서 그의 경력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라고 덧붙였다.[29]
브렌던 길은 ''뉴요커''에 각본가와 감독이 "실패하지는 않았지만, 진정한 성공은 그들의 손이 닿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말론 브란도가 플레처 크리스찬을 햄릿처럼 연기한 것을 비판하며, 트레버 하워드가 연기한 블라이 선장에게 동정심을 느끼게 된다고 썼다.[30]
리처드 L. 코는 ''워싱턴 포스트''에 이 영화를 "의심할 여지 없이 잘생긴 웅장한 작품"이라고 칭하며, 세 번째 시간에 "터무니없는 상황으로 머리부터 곤두박질친다"고 평가했다.[31]
영국의 ''월간 영화 게시판''은 브란도의 "터무니없이 가짜 상류층 영국 억양"과 연출을 비판했다.[32] ''타임''은 이 영화가 "어리석은 낙천주의의 거친 상투어를 오가다가 마침내 감상적인 빌지에 휩쓸려 갔다"라고 썼다.[33]
이 영화는 로튼 토마토에서 20개의 리뷰를 바탕으로 70%의 평점을 받았으며, 평균 평점은 6.5/10이다.[34]
''바운티 호의 반란''의 어렵고 문제적인 제작, 브란도의 변덕스럽고 괴팍한 행동, 브란도의 연기에 대한 압도적으로 부정적인 평가, 그리고 영화의 흥행 실패는 브란도의 경력과 스타성을 손상시켰으며, 이는 10년 후 ''대부''가 개봉되면서 되살아났다.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은 나중에 브란도의 ''바운티 호의 반란''에서의 연기를 "끔찍했다"고 말했다.[35]
5. 2. 흥행
이 영화는 1962년 흥행 5위를 기록했으며, 미국 내에서 13680000USD를 벌어들였다.[2] 연말까지 미국 내 극장 임대료는 7400000USD였다.[37] ''버라이어티''는 임대료가 9800000USD까지 오를 것으로 추정했다.[38]
하지만 제작비 19000000USD를 회수하려면 30000000USD를 벌어야 했다.[17] 이는 이 영화가 흥행 참패였음을 의미한다.[39] 스튜디오는 그 해 17000000USD의 손실을 입었다.[40]
이 영화는 이 시기 MGM에서 제작된 ''왕 중의 왕'', ''서부 개척사'', ''그림 형제'', ''묵시록의 4기사''와 같은 대작 중 하나이다.[41]
음악: 브로니슬로 카퍼; 앨범 프로듀서 & 라이너 노트: 루카스 켄달; 라이너 노트: 제프 본드; 앨범 아트 디렉션: 조 시코략
로렐 어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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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운티 호의 반란"의 러브송 (날 따라와)" 작곡: 브로니슬로 카퍼; 작사: 폴 프랜시스 웹스터
이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포함한 7개 부문에서 후보로 올랐으나, 수상에는 실패했다.[42][43]
6. 역사적 사실과의 차이점
영화에서 블라이와 크리스찬은 처음 만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들은 이전에 함께 항해한 적이 있다.[12][13]
크리스찬은 장교가 아니라, 실제로는 항해사(준사관)이다.
반란은 실제로는 블라이가 잠든 사이에 일어났지만, 영화에서는 눈 앞에서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크리스찬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영국으로 귀국하려고 했고, 이를 두려워한 동료가 바운티에 지른 화재로 죽지만, 실제로는 핏케언 섬에서 수년간 산 후에 살해되었다.(수년 후에 영국으로 귀국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있다.)[15]
7. 영화 속 논란과 뒷이야기
보즐리 크로더는 ''뉴욕 타임스''에 "순수한 구경거리로서 눈을 즐겁게 하고 압도하는 부분이 많다"라고 썼지만, 말론 브란도가 플레처 크리스찬을 "강력한 해군 장교보다는 멋쟁이처럼 만들었다"라고 비판하며 "이 연기는 조롱이나 장난으로 의도된 것처럼 느껴진다"라고 평했다.[28] ''버라이어티''는 이 영화를 "종종 압도적으로 웅장하다"라고 칭하며 1935년 버전에 비해 "전반적으로 뛰어나다"라고 평가했고, "브란도는 여러 면에서 그의 경력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라고 덧붙였다.[29]
브렌던 길은 ''뉴요커''에 각본가와 감독이 "실패하지는 않았지만, 진정한 성공은 그들의 손이 닿지 않았다"라며 비판했다. 그는 플레처 크리스찬을 햄릿처럼 연기한 말론 브란도의 연기를 지적하며, "플레처 크리스찬이 해야 할 말이 햄릿이 할 말보다 훨씬 덜 흥미롭기 때문에 브란도의 고뇌에 찬 찡그림은 완전히 부적절하게 보인다"라고 평했다. 또한 트레버 하워드가 연기한 블라이 선장에게 동정심을 느끼게 된다며, "젊은 고귀한 바람둥이가 매 순간 그를 도발했으니 그가 그렇게 나쁘게 행동한 것도 당연하다"라고 덧붙였다.[30]
리처드 L. 코는 ''워싱턴 포스트''에 이 영화를 "의심할 여지 없이 잘생긴 웅장한 작품"이라고 칭찬했지만, 세 번째 시간에는 "터무니없는 상황으로 머리부터 곤두박질친다"라고 평가하며, "영웅이 화가 나서 자존심이 상해서 반란이 일어난 것 같다"라고 요약했다.[31] 영국의 ''월간 영화 게시판''은 브란도의 "터무니없이 가짜 상류층 영국 억양"과 연출이 "여러 엉터리 작품처럼 보인다"라고 비판했다.[32] ''타임''은 이 영화가 "어리석은 낙천주의의 거친 상투어를 오가다가 마침내 감상적인 빌지에 휩쓸려 갔다"라고 평가했다.[33]로튼 토마토에서 이 영화는 20개의 리뷰를 바탕으로 70%의 평점을 받았으며, 평균 평점은 6.5/10이다.[34]
''바운티 호의 반란''은 제작 과정이 어렵고 문제가 많았으며, 특히 말론 브란도의 변덕스럽고 괴팍한 행동과 그의 연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그의 경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상황은 10년 후 ''대부''가 개봉되면서 반전되었다.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은 훗날 브란도의 ''바운티 호의 반란''에서의 연기를 "끔찍했다"라고 회고했다.[35]
7. 1. 말론 브란도의 행동 논란
말론 브란도는 촬영장에서 잦은 지각, 즉흥적인 연기, 과도한 요구 등으로 제작진과 갈등을 빚었다.[17] 그는 영화의 내용과 결말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며 제작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8]
브란도는 과식으로 인해 의상실에서 52벌의 바지를 찢기도 했으며,[51] 친구의 타히티 결혼식 장식을 위해 촬영 스태프를 보내거나, 자신의 파티를 위해 비행기로 값비싼 음식과 음료를 공수해 오는 등 과격한 행동을 보였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불태워질 예정이었던 바운티 호 레플리카와 관련해서도, 브란도는 예비 레플리카가 제작되지 않으면 촬영을 계속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감독과 프로듀서는 그의 요구에 굴복해야 했다.[51]
이러한 브란도의 행동은 영화 제작에 어려움을 더했으며, 그의 경력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35]
7. 2. 감독 교체
캐럴 리드 감독은 제작진과의 불화 및 제작 기간 문제로 영화 제작 도중 하차했다.[20] 리드는 100일 안에 영화를 완성해야 했지만, 139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스튜디오와 갈등을 빚었다.[20] 결국 스튜디오는 리드를 해고하고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으로 교체했다.[21] 리드의 하차는 담석과 열사병 발작이 원인으로 알려졌으나,[14] 이야기 방향에 대한 이견 때문에 불만을 품었다는 주장도 있다.[14]
7. 3. 기타 논란
말론 브란도(Marlon Brando영어)의 과격한 행동은 촬영 당시부터 여러 논란을 일으켰다. 피터 맨서의 저서에 따르면, 브란도는 친구의 타히티 결혼식 장식을 위해 촬영 스태프를 보내거나, 자신의 파티를 위해 비행기로 값비싼 음식과 음료를 공수해 오게 했다.[51] 또한 브란도는 과식으로 인해 의상실에서 52벌의 바지를 찢기도 했다.[51]
브란도는 훗날 마이미티 역을 연기한 타리타 테리피아와 실제로 결혼했다.[51]
영화를 위해 바운티 호의 움직이는 레플리카가 제작되었지만,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불태워지도록 되어 있었다. 브란도는 예비 레플리카가 제작되지 않으면 영화 촬영을 계속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감독과 프로듀서는 결국 브란도의 요구에 굴복하여 불태울 레플리카를 제작하고, 원래의 레플리카는 남겨두었다. 이 레플리카는 2007년 여름에 영국의 여러 항구를 방문했다.[51] 이후, 2012년 발생한 허리케인 샌디의 영향으로 침몰했다.[52]
8. 영화가 남긴 영향
이 영화는 바운티 호의 반란 사건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권위주의적인 리더십과 자유주의적인 가치관을 대비시켜 권력과 저항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8][9] 플레처 크리스찬 역을 맡은 말론 브란도는 이 영화를 통해 타히티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50] 이 영화는 1960년대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운동과 사회 개혁 열망과 맞물려 권위에 대한 저항과 자유를 향한 갈망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8. 1.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
이 영화는 바운티 호의 반란 사건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8] 특히, 플레처 크리스찬 역을 맡은 말론 브란도는 이 영화를 통해 타히티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50] 그는 촬영 중 타히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1966년에는 테티아로아 환초를 99년간 임대하기도 했다.[50]
브란도는 영화에서 자신의 연인 역을 맡았던 타히티 출신 배우 타리타 테리파이아와 1962년 8월 10일에 결혼했다.[15] 두 사람은 두 자녀, 테이호투 브란도와 타리타 체옌 브란도를 두었으나, 1972년 7월에 이혼했다.[15] 이후 브란도는 타히티에서 생활하며 환경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8. 2. 역사적 사건의 재조명
영화는 윌리엄 블라이 선장의 권위주의적인 리더십과 플레처 크리스찬의 자유주의적인 가치관을 대비시키며, 권력과 저항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8][9] 특히, 1960년대 한국 사회는 민주화 운동과 사회 개혁에 대한 열망이 높았던 시기로, 이 영화는 권위에 대한 저항과 자유를 향한 갈망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9. 기타 정보
말론 브란도는 과식으로 인해 의상실에서 바지 52벌을 찢었다.[51] 그는 훗날 마이미티 역을 연기한 타리타 테리피아와 실제로 결혼했다.
영화를 위해 바운티 호의 움직이는 복제선이 제작되었지만, 이야기 마지막 부분에서 불태워질 예정이었다. 브란도는 예비 복제선이 제작되지 않으면 영화 촬영을 계속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감독과 프로듀서는 결국 브란도의 요구에 굴복하여 불태울 복제선을 제작하고, 원래의 복제선은 남겨두었다. 이 복제선은 2007년 여름 영국의 여러 항구를 방문했다.[51] 이후, 2012년 발생한 허리케인 샌디의 영향으로 침몰했다.[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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